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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음악은 가야금음악으로 대표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실왕(嘉實王)이 중국 당의 쟁(箏)을 모방하여 가야금을 만들고,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이 12곡의 가야금 음악을 지었다고 전한다.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함안군)」·「상가라도(上加羅都, 고령군)」·「보기(寶伎, 곡예)」·
「달기(達己, 달기현)」·「사물(思勿, 사물현)」·「물혜(勿慧, 마리현)」·「하기물(下奇物, 금물현)」·
「사자기(獅子伎, 기악)」·「거열(居烈, 거창군)」·「사팔혜(沙八兮, 팔혜현)」·
「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 하기물)」이다.
이 중에서 「보기」·「사자기」·「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명과 같아서 해당 지방 민요의 성격을 띤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즉, 각 지방의 향토음악과 민간에 전승되던 놀이를 토대로 만든 음악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각 지방의 민요에는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지명이 들어간 곡들이 있다. 이러한 곡들은 그 지역의 특징을 나타내는
민속음악인 경우가 많다.
이렇듯 우륵이 지은 12곡에는 당시 가야국 여러 지방의 지명(地名)이 들어있어,
향토색 짙은 각 지방의 향토음악과
민간에 전승되던 놀이를 토대로 만든 음악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가야가 망하자 우륵은 제자 이문과 함께 진흥왕 12년(551년)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진흥왕은 그를 충주(忠州)에 살게 하고,
신라의 관리인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에게
노래, 가야금, 춤을 가르치게 하였다.
우륵의 가야금 음악은 제자들에 의하여
보다 아정(雅正)한 음악으로 다듬어져 신라의 궁중음악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우륵(于勒))
생몰연대 미상.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우륵의 나라 가야는 6가야 중에서 대가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551년 이후 562년에 멸망한 가야가 대가야이기 때문이다.
한때 가실왕이 우륵에게 이르기를,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가얏고를 위해
악곡을 지으라고 하여 12곡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가얏고를 들고
제자 이문(泥文)과 함께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는데,
왕은 그를 맞아 국원(國原)에 안치시키고
계고(階古)·만덕(萬德)·법지(法知) 등을 보내어 그의 업(業)을 전습하게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얏고,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
그 후 이들은 우륵이 만든 12곡을 듣고는 “이 곡들은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
고 하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우륵이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매우 노하였으나
새로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에는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아정하다(아담하고 곧바르다) 하겠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위의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가야금은 가실왕이 만들었고, 우륵은 그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민속악 12곡을 만들었다.
가야가 멸망하자 우륵은 신라로 투항하였고,
그곳에서 3명의 제자들에게 12곡에 따른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 곡이 번잡하고 음란하여 5곡으로 줄였고,
그 곡을 우륵에게 들려준다.
화를 참고 듣던 우륵의 반응은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만 하구나(낙이불류 애이불비 樂而不流 哀而不悲)" 라고 감탄한다.
이러한 현상은
멸망해 가는 가야에서는 우아하고 바른 음악이 아닌
흥청거리며 희로애락을 표출할 수 있는
민속악 12곡을 작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정권에 접어든 신라의 분위기에서는
우륵이 작곡한 흥청거리는 음악을 번잡하다 여기고
다듬고 축약해서 5곡으로 만든것이다.
그 다섯곡을 들은 우륵은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고
낙이불류 애이불비 樂而不流 哀而不悲라고 표현한다.
즉 즐겁지만, 흥청거리며 방종에 가까울 정도로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지만, 통탄할 정도로 가슴을 치며 비통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음악을 이분법으로 하면 정악과 민속악으로 구별하는데
우륵이 지은곡이 민속악이라면
제자들이 편곡한 곡을 정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외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빚은 흙인형[土偶]이
신라지역에서 여러 개 출토되었는데,
그 시기는 가실왕이나 우륵의 생존연대보다 앞서고 있다.
또한 삼한시대에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고’라는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는 점으로 보아,
가실왕이 가야금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전해오는 고유의 현악기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가야금처럼 개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흙인형에 보이는 악기나
9세기에 일본에 전해져 현재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가야금 (일본에서는 신라금이라 부름)의 모양은 오늘날의 풍류가야금과 크기나 모양이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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