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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음악을 살펴보기 전 신라왕조 중 주요시기를 먼저 정리하면,
1대 시조 혁거세(BC57~AD4) 거서간 박혁거세
2대 남해(4~24) 차차웅, 왜국과 낙랑과의 전투
3대 유리(24~57) 이사금, 회악 ~~~
15대 기림(298~310) 국호를 신라로 칭함
19대 눌지(417~458) 묵호자가 불교전래
20대 자비(458~479) 왜국에 대승, 고구려에 대응, 대악
22대 지증왕(501~514) 순장금지, 왕호사용
23대 법흥왕(514~540) 가야와 혼인, 이차돈순교, 가야항복
24대 진흥왕(540~576) 백제와 화친, 우륵과 가야금, 황룡사건축, 원화와 화랑
27대 선덕여왕(632~647) 첨성대(국보31호)
28대 진덕여왕
29대 무열왕
30대 문무왕(661~681) 삼국통일 경주
신라의 음악은 24대 진흥왕때 가야사람 우륵에 의하여 전해진
가야의 음악과 노래·춤 등이
신라 궁중의 음악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소박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향토음악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등에 보인다.
유리왕(24-57년)때 음악인 회악(會樂, 會蘇曲),
탈해왕(57-80년)때 음악인 돌아악(突阿樂),
자비왕(458-478년)때 백결선생이 지은 대악(?樂)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밖에도 신라 여러 지역 음악의 제목이 전해지나,
음악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이것은 번잡하고 음란하니,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축약하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그 다섯 가지의 음곡을 듣고 나서는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만 하구나,
너희는 그것을 왕의 앞에서 연주하라,”
가야음악에서도 언급된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우륵이 만든 12곡을 신라인 제자 계고, 법지, 만덕이 5곡으로 줄여 연주를 하였다.
그들이 줄인 5곡은 우륵이 만든 12곡처럼
기쁘고 슬픈 내면의 감정이 모두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절제된 음악이었다.
내면에서 한차례 정화(승화)시켜 외부로 표현되는 것은
자유분방하고 극적인 즐거움이 아니고
처참할 정도의 비통한 슬픔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무미건조한 음악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우아하고 바른 음악으로 기록된 것이다.
우륵이 그 다섯 곡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해서
임금 앞에 가서 연주하라 했고
그 곡을 들은 임금 역시 감동하여 대악(궁중음악)으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신라의 음악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소박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고
일본에 전해진 삼국의 음악 중 신라악은
단지 금(가야금), 노래, 춤으로 구성된 단순한 편성의 음악이었다.
이는 신라의 지리적 위치가 중국 등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불편하였기 때문인데,
이 점에서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음악은 고유의 향토성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창원(쇼쇼잉)에 소장된 가야금의 설명과 사진 복원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창원은 나라에 있는 도다이지의 부속 건물로 건립되었는데,
훗날 일본 황실의 귀중품을 소장・관리하는 곳이 되었다.
시라기고토를 비롯한 비파・완함(阮咸)・금(琴) 등 현악기와 여러 가지 관악기 등
약 18 종류의 악기 75 점이 5~8세기 무렵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 중 시라기고토(신라금의 일본 발음)도 3대나 있는데,
쇼소잉측은 신라 가야금의 장식과 보존상태에 따라
각각 ‘금가루를 이겨 그림을 그린 신라금’, ‘금박을 눌러 장식한 신라금’, ‘신라금 부서진 것’ 등으로
명명한 바 있다.
이 중 금가루로 그림을 그리거나 금박장식을 한 가야금은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데
사진자료는 공개 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신라에서는 삼국통일 이전에 이미 국가기관으로 음성서(音聲署)라는 기관을
예부(禮部)에 설치하고, 관리들을 두어 음악과 관련된 일을 보게 하였다.
음성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기관인데,
통일 이후 경덕왕 때는 대악감(大樂監)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혜공왕 때 다시 음성서로 고쳤다.
음성서는 궁중의 의식이나 연회와 관련된 음악행정을 맡아보았다.
화랑도의 수련과정 등을 통하여 추측하건대,
신라에서는 청소년의 정서수련에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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