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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통일신라시대의 음악문화

카테레사 2022. 8. 23.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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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에는 고구려가 멸망한다.

670~676년에는 나당전쟁으로

675매소성, 676기벌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 결과 당나라가 평양 이북으로 철수하며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하게 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을 수용하여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인 세가지 현악기(삼현)와

대금 중금 소금인 세가지 관악기(삼죽)를 갖추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떠다니고 더욱 기이한 일은 그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 가 있는데,

낮에는 둘로 나누어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나이다.
왕이 이상히 여겨 몸소 그 곳까지 찾아가 용에게 연유를 알아본즉,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낮에는 둘로 나뉘어 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기이한 대나무를 베어 악기를 만들었다.

요즈음 처럼 홍수가 날때 이 악기를 불면 맑게 개어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 지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쳐들어오는 적군이 물러가며, 질병이 쾌유되는 등

온갖 근심스러운 일들이 악기를 불면 해결되니 이 악기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불렀다. 

코로나처럼 질병이 창궐한 요즈음에 딱 필요한 악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만파식적 설화는 실화가 아닌

무열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썰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외에 고구려 악기였던 거문고의 전승

신라골품사회에서 평민으로선 가장 높은 층의 귀족이던 옥보고를 비롯하여

속명득으로 이어지고, 이후 귀금선생, 청장과 안장 그리고 극상과 극종에

이르는 계보가 전한다. 

 

밖으로는 중국을 통하여 불교음악과 서역음악을 받아들였고, 

일본에 신라의 음악을 전하기도 하였다.

 

♤ 향악과 당악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을 수용하여 한민족 고유의 음악인 향악의 틀을 갖추었다. 

통일신라의 향악에 사용되는 악기는 거문고, 가얏고,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 박판, 대고이다. 

이 중 거문고, 가얏고, 향비파를 삼현(三絃)이라 하며, 

대금, 중금, 소금을 삼죽(三竹)이라 한다. 

고구려 악기인 거문고는 통일 이후 한 동안 전승이 활발하지 않았으나, 

통일신라 말기에는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옥보고(玉寶高)가 지은 거문고음악 30곡의 제목이 전하고 있다. 

, 삼죽에 쓰이는 악조 이름에 중국 당나라 악조 이름이 들어 있는 점으로 보아, 

당나라 음악의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삼현과 삼죽 이외의 악기인 박판과 대고 역시 외래음악을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한편 최치원은 월전(月顚), 대면(大面), 금환(金丸), 속독(束毒), 산예(?) 5수로 이루어진 

<향악잡영(鄕樂雜詠)>을 남겼는데, 

주로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전해온 놀이를 주제로 한 최치원의 이 작품에 

향악이란 명칭이 사용된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중국음악을 지칭하는 당악의 대칭으로 당악 전래 이전에 들어 온 서역음악까지를

향악이라 부른 것으로 본다.

 

<향악 잡영 오수>  섬국사기 권 제32, 잡지1

금환(金丸, 7개의 공을 양손으로 던지고 받는 공놀이)

월전(月顚, 술잔을 다투며 노래하는 우전지방의 놀이, 재담)

대면(大面, 탈춤), 속독(束毒, 가면무), 산예 (䝜猊, 서역지방의 사자놀이)

금환
몸을 돌리고 팔 휘두르며 금환을 가지고 노니, 달이 구르고 별이 흐르는 듯 눈에 가득 신기롭다.
좋은 동료 있다 한들 이보다 더 좋으리, 넓은 세상 태평한 줄 이제사 알겠구나
金丸 廻身掉臂弄金丸 月轉星浮滿眼着 縱有宜僚那勝此 定知鯨海息波瀾
 
월전
높은 어깨 움츠린 목에 머리털 일어선 모양, 팔 걷은 여러 선비들 술잔 들고 서로 싸우네.
노랫소리 듣고서 사람들 모두 웃는데, 밤에 휘날리는 깃발 새벽을 재촉하누나
 
대면
황금빛 얼굴 그 사람이 구슬채찍 들고 귀신 부르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운치있게 춤추니,
붉은 봉새가 요 시대 봄철에 춤추는 것 같구나
 
속독
엉킨 머리, 남색 얼굴 사람과는 다르네. 떼지어 뜰 앞에 와서 난새 춤을 배우네.
북치는 소리 둥둥 울리고 겨울바람 쓸쓸하게 부는데, 남쪽 북쪽으로 달리고 뛰어 한정이 없구나
 
산예
1만 리 머나먼 길 서방 사막 지나오느라 털옷은 다 해어지고 티끌만 뒤집어썼네.
머리와 꼬리를 흔드는 모습, 인덕이 배어 있도다. 영특한 그 기개 온갖 짐승 재주에 비할소냐?
 

산예와 같은 사자춤이 연행되는 곳은 현재 봉산탈춤·통영오광대·수영야류·하회별신굿탈놀이 등이 있다.

이 시기 당악의 전래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문헌 기록은 없으나,
문무왕 4(664)에 당시 공주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에 사람을 보내어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악의 전래는 악기나 악조명의 수용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불교미술품에는 요고, 횡적, 공후, 생 등의 악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들 악기가 당시에 실제로 신라의 음악에 사용되었는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범패(梵唄)의 전래
불교 의식음악인 범패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겠지만, 

이에 대한 문헌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전하는 경덕왕 때 월명사(月明師)가 도솔가(兜率家)를 짓는 과정을 통하여 

8세기경에 범패가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830, 진감선사(眞鑑禪師)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경상남도 하동 옥천사(玉泉寺, 현 쌍계사-雙鷄寺)에서 범패를 가르쳤는데, 

이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신라인 사찰인 적산원(赤山院)에서는

신라풍의 범패와 일본에서도 전해진 바 있는 고풍(古風)의 범패가

함께 불려지기도 하였다. 전문적인 의식노래인 범패가 들어와 널리 불리는 한편, 

불교의 포교를 위한 거사소리도 불렸는데, 

원효의 무애가는 향토색이 짙고, 노래의 내용도 이해하기 쉬운 신라말로 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안압지, 횡적을 연주하는 천인
상원사 동종의 비파와 생황
상원사 동종의 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