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조양구락부 정악유지회 조선정악전습소 기생의 변화
1. 조양구락부(한국정악원의 전신)
1) 1909년 9월, 서울 도동에 설립
2) 예로부터 전승된 가요ᆞ음율ᆞ악기들의 전통을 연구하여 그 참모습을 가르치고 익히기 위한 취지
3) 발기인: 김경남(가곡반주 출중), 하순일(하규일의 종형, 가곡남녀창 권위), 조남 한석진,
이병문(영산회상연주 신묘), 백용진(양금전공), 고우경, 한규우, 김현주, 한진구 (-거문고 명인)
4) 교사 구성: 각과 감독 – 함재운, 가요부교사장 – 하순일, 가교사 - 신경선. 장덕근. 이영환,
무교사 - 이병문. 함화진, 음악부교사장 – 김경남, 현금교사 - 이병문. 조이순, 휘금교사 – 고상익
5) 조양구락부 제 1회 평의회 결의안
왕조시대의 임금이 지으신 가곡의 음율을 익히고 오래도록 전하여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시기에 적당한 애국가와 민간에 떠도는 풍요를 수집하여 국가의 보통가요를 만들어 보급하기 위하여
정과 즐거움이 가득한 가요를 만들어 집집마다 보통가로 남녀 모두 부르게 하기 위하여
나라간의 교제와 손님접대를 위한 예곡을 만들어 공사연에 응용케하기 위하여
가악과 무기(舞技)를 가르치고 익히게 하여 황실의 큰 연회에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서양악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가보(歌譜)를 수집 편찬하기 위하여
6) 장악원이 1908년 이후 예부의 하위 기관으로서의 기능이 거의 정지되었고,
군악대 중 하나였던 내취까지 통폐합 됨
7) 이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던 민간의 지사들이 조선 장악원 전통의 단절을 막고
전통적 가무를 계승· 회복하며 새로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음악기관 설립
8) 조선악과 서양악을 함께 교수
9) 황실은 내탕금 2,400원을, 매달 200원의 지원금 지원
10)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로 전환
11) 정악유지회라는 후원회에 의하여 유지
12) 역할 및 기능
관기 출신 기생들의 연합체였던 기생조합의 교육 담당
1912년 이후로는 시동 기생들의 학습도 도와 줌
조선정악전습소의 ‘여악분교실’에서 담당
13) 여악분교실의 교육 내용- 과거 관기들의 레퍼토리
14) 조양구락부·조선정악전습소에서 기생을 학습시킨 결과는
관기 출신 기생과 민간 기생 간의 가무 격차의 해소
15) 조선정악전습소의 학습 프로그램은 이후로 설립된 서울의 기생학교의 기초 과목이 됨
16) 사업 종목
○ 구가(舊歌)는 남창과 여창의 우조와 계면조 및 가사: 남창(우조 초수대엽, 이수대엽,
중거, 평거, 두거, 삼수대엽, 소용, 우롱, 우락, 언락, 우편, 계면조 초수대엽, 이수대엽,
중거, 평거, 두거, 삼수대엽, 소용, 언롱, 평롱, 계락, 편수대엽, 언편, 태평가, 반우반계인 평엽, 편락),
여창(우조 이수대엽, 중거, 평거, 두거, 반엽, 계면조 이수대엽, 중거, 평거, 두거, 평롱,
우락, 환계락, 계락, 편수대엽, 태평가), 12가사
○ 구악은 현금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와 그밖의 각종 음악 포함: 각종 악기전공, 영산회상,
도드리, 여민락, 가곡반주 등 합주와 독주
○ 신악은 풍금 사현금을 주로 하되 악리를 서면으로 교수
○ 음악보를 편집: 악학궤범의 복간, 구악보발간, 영산회상등 서양악보로 채보 발간
2. 정악유지회
1) 1911년 2월 이준공 . 박영효 . 윤택영 . 민병석 . 조중웅 . 윤덕영 . 유길준 .
이지용 . 김종한 . 민영찬 . 박기양 . 김승규의 발인- 이들 중 유길준과 민영찬을 빼고는
모두 친일파, 일제강점기
2) 의의: 20세기 최초로 고급음악을 지향한 민간의 음악기관
3) 조선정악전습소는 이화여전 음악과가 설립되기 전에 유일하게 운영되었던 전문 음악교육기관
4) 조양구락부 및 조선정악전습소와 관련했던 기생들은 내실 있는 공연을 펼쳤고,
남성들은 음악계 및 음악교육계의 주역이 되었으며, 양악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했던 학생들은
1930년대 이후 한국 양악계의 거목이 됨
3. 조선정악전습소
1) 1911년 6월 설립
2) 구성원: 조양구락부 시절과 거의 유사
3) 함화진 같은 궁중악사 출신의 음악가, 조이순ᆞ하순일 등과 같은 서울의 민간 풍류계의 명인들,
김인식과 같은 양악의 선구자도 포함
4) 학생들을 모집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지도
5) 교육 프로그램 중에는 조선의 민간 고급음악과 당시 수입된 서양음악이 포함
6) 조선정악전습소의 음악교육 목표는 예악이념 가운데 정치교화론을 고수하는 한편
음악을 통해 민첩하게 근대 국민 국가를 건설
7) 이 과정에서 서양음악도 능동적으로 수용해내기는 했지만 근대적 전문 음악가 양성이라는 목표를
균형감 있게 실천하는데는 한계가 있었음
8) 학칙: 학생수 50명, 학기는 3학기, 학과는 조선악과 서양악
9) 분과: 조선악은 가곡 . 현금 . 가야금 . 양금 . 단소 . 생황 . 취악 등,
서양악과는 성악 . 악리 . 창가곡조. 풍금. 사현금
10) 학생의 졸업기간은 양학기로 하며, 입학자격은 중등이상의 학력, 연령은 15세 이상으로 제한
11) 대표적인 교사에는 가곡의 거장인 하규일과 조선후기 거문고 3절인 함재운 . 이병문 . 김경남과
거문고 명인인 조이순. 가야금 대가인 명완벽 등으로 구성
12) 졸업생으로는 2회 성악과를 졸업하고, 다시 3회에 기악과를 졸업한 홍난파 등이 있음
13) 악보편집 - 악학궤범 3책 편집 . 현금보와 양금보로 남창과 여창 가곡의 반주보 4책 편집 .
영산회상과 여민락의 서양악보 채보
14) 조양구락부와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기생습악 교육은 일제에 의한 황민화 정책의 일환
15) 기생과 같은 천빈 계층에게 조선악을 지도함으로 일본음악이 조선음악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
16) 1915: 활동정지→1927: 폐소, 조선음악연습소로 개칭
→ 1930: 조이순과 하규일 . 김상순 등의 ‘수요회’ 창립 → 1935: 조선정악전습소
→ 1938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정악전습소가 30년간 천명이상을 양성
→ 1947: 사단법인 조선정악원으로 개칭 → 한국정악원
17) 김인식-1911.9정악전습소의 양악교사로 취임,
1914.3. 『조선구악 영산회상』오선보채보 출판
1928.3 재판, 신문당서점 발행, 영산회상 상령산~군악까지 전곡 채보, 오선보와 함께 양금구음병기
18) 신구악 1회 졸업생(1912.3)조선악 5명, 서양악 13명
- 제2회 졸업생(1913.4 )조선악13명, 서양악7명
- 제3회 재학생(1913.10) 조선악16명, 서양악 33명
19) 양악계의 선구자인 이상준과 홍영원(난파)이 정악전습소 출신
20) 이상준(2회졸업생, 조선악 가곡전공)- 조선속곡집(1912), 신구속가집(가곡 시조 잡가 30여곡),
조선신구잡가(90곡), 신유행창가(20곡), 보통악곡대요 부행진곡(40곡) 출판
4. 결론
1) 조양구락부의 목표는 조선악을 근본으로 삼아 연구하여 새로 수용되는 서양악에 적용 . 연결시키고자 함
2) 조양구락부는 단지 구가악의 전습에 그친 것이 아니라, 서양음악을 발전시키고 아울러 음악이론의 체계화.
악보의 편집 및 간행 등 진취적인 음악활동을 펼침
3) 조선정악전습소는 음악교육을 실시하다 재정적인 곤란으로 음악교육기관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음악교육을 담당
4) 이 기관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조선악 분야에서는 정악의 전승에 기여하였으며,
서양악 분야에서는 서양음악의 수용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 주목
5) 친일파의 재정적 지원으로 애국계몽정신은 고취 할 수 없었으며, 기생조합의 교육으로
일본의 민족정책 말살에 한 몫을 한 것은 오점이지만,
한 기관에서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동시에 교육하였으며,
구악보를 오선보로 채보한 업적은 높이 평가 됨
5. 기생의 변화 (전통말살)
1) 19c말 여성 음악인: 관기와 창녀(기생계열과 패거리계집 계열) 2부류
2) 관기와 유성기음반에 풍류계음악을 녹음한 기생이 같은 부류
3) 창녀와 유성기음반에 잡가를 부른 패거리 여성이 같은 부류
→ 20c초 1902년 협률사 공연준비 기생은 관기와 예기 2부류였으나 같은 무대에 서면서 구분이 모호해짐
4) 관기인 태의원 소속 의녀와 상의사 침선비의 레파토리는 풍류계음악
5) 예기인 무명색, 삼패의 레파토리는 산염불과 양산도였던 경계가 허물어짐
→ 1908년 기생 계급구도해체
6) 장악원의 상위기관이 예조에서 궁내부로 변화
7) 장악원에 소속되지않았던 취악내취와 세악내취를 장악과(궁내부)로 이관
8) 장악원 관리하에 있던 기생들이 경시청관리로 이관(여악의 전통이 사라짐)
9) 1903관기와 삼패가 한 무대에서 공연
→ 1908 관기의 혁파(기생 창기 단속령: 일제가 공창 산업을 주도하고 이에 대한 세금을 걷기 위함 )
→ 1909 삼패 기생의 조직화(한성유녀조합 설립: 명월관의 가무와 원각사공연 및 지방순회연주)
→ 1911 한성유녀조합이 한성조합, 광교조합, 유부기조합으로 불림
→ 1912 다동기생조합(한성조합에 차별적으로 평양, 서울, 지방기생 포함,
하규일에 의해 조선정악 전습소의 여악분교실이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짐
- 1915관허대정권번으로 바뀜, 친일파송병준이 영업지원, 하규일 물러남,
일본인이 관리-1919년까지 성업)
→ 1914 일본기생집단은 권번, 조선집단은 조합 → 1915 한성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바뀜
→ 1914 삼패출신 기생조합인 신창조합(1915 경화권번), 분동 창기조합(서울지역 삼패출신)
→ 1917 경상도 전라도 기생중심인 한남권번
→ 1924 한성, 한남(조선인경영)/ 대정, 조선권번(일본인이나 친일파 경영)
→ 1932 장안의 4대권번 - 한성, 대동, 한남, 조선
참고자료
1) 장사훈, ‘한국 최초의 민간음악 교육기관 - 조양구락부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음악의 전개 양상』, 민속원, 2005, 731-770쪽.
2) 박은경, ‘한국최초의 민간음악교육기관 조선정악 전습소 연구’ 『음악과 민족』(2001)
3) 강혜인, ‘조선정악전습소 연구’『한국근대음악의 전개양상』, 민속원, 2005, 9-75쪽.
4) 권도희, ‘20세기 기생의 음악사회사적 연구 ’, 『한국 근대음악의 전개 양상』, 민속원, 2005, 77-110쪽.
'전통음악의 이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8강. 민속음악의 변천 (0) | 2023.01.19 |
---|---|
가악과 영산회상의 이해 (2) | 2023.01.17 |
5강. 풍류음악의 변천: 정악에서 풍류음악, 고악보 (1) | 2022.12.31 |
4강- 궁중음악기관의 변천 및 의궤 (0) | 2022.12.28 |
3강. 궁중공연의 춤 - 일무와 정재 (2) | 2022.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