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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해 5경에 대한 대략적인 추정

 

(1) 상경용천부:제3대 문왕대~ 제5대 성왕대 중 130여 년 수도로 번영

 지금의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닝안 현[寧安縣] 동경성지역을 그 옛 터로 보는 것이 정설

(2)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제3대 문왕대 초의 수도였으며 상경과 함께

 발해의 2대 도시로 각광을 받았다. 중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설이 제기되어 정설이 없다. 

(3) 동경용원부:제3대 문왕의 치세 후기(781~793)부터 제5대 성왕대까지 발해의 수도.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동경이 상경의 동남쪽 바다 가까운 곳에 있다고만 되어 있어

 1930년대 말까지 정확한 위치비정이 이루어지지 못함.

(4) 남경남해부:〈신당서〉 발해전에는 남경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고,

 근래에 함흥 일대에서 발해관계 유물이 잇달아 발견되어 함흥이 남경일 가능성이 큼

(5) 서경압록부:문헌에는 서경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남경·서경은 5경 가운데 수도가 되지 못했던 도시로

상경·중경으로 이어지는 대외 교통상의 요지로 번영

 

2. 발해왕의 계보

1) 제1대 고왕(698~719) 대조영, 국호 발해

* 698년 - 고구려 멸망(668)후 대중상(걸걸중상)이 아들 대조영과 함께 영주로 옮김,

 고왕(대조영)이 동모산으로 옮겨 진국을 세움, 고구려의 옛 주민은 모두 발해로 흡수

* 713년 - 말갈이란 칭호를 버리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2) 제2대 무왕(719~737) 대무예, 인안(연호), 발해국의 기틀을 다짐

* 732년- 당나라 공격

* 733년- 당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의 남쪽을 공격했으나 성과 없이 물러남,

     구국에서 현주로 천도

 

3) 제3대 문왕(737~793) 대흥무, 대흥·보력(연호), 발해국의 성장

*  739년 - 서요덕이 일본의 사신으로 감, 그의 직책이 약홀주의 도독이었는데, 약홀주는 고구려식 명칭임

*  740년 - 일본왕이 발해사신 기진몽을 위해 잔치를 베품(발해악이 처음 알려짐)

   『속일본기』권13, 『발해국지장편』권20

*  749년 - 일본 궁중에서 당악·오악과 함께 발해악 연주(『고사유원』)

*  756년 - 안록산(755년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의 당나라 전난)의 난으로

   현주에서 상경으로 천도

*  759년 - 일본에서는 발해를 고려로 칭함

*  777년 - 정혜공주 사망

*  790년 - 신라에서 백어가 사신으로 파견

*  792년 - 정효공주 사망

*  8~9세기 - 음악관장기관 太常寺와 의부(『신당서』권219,『발해국지장편』권15)

 

4) 제4대 폐왕(793) 대원의, 포악하여 살해됨

 

5) 제5대 성왕(793~794) 대화여, 중흥

 

6) 제6대 강왕(794~809) 대숭린, 정력, 당과 일본의 사신파견

 * 798년 - 일본에서 6년에 한번씩 사신을 파견하라고 통보

 

7) 제7대 정왕(809~812) 대원유, 영덕

8) 제8대 희왕(812~817) 대언의, 주작, 발해 불교의 전성기

9) 제9대 간왕(817~819) 대명충, 태시

10) 제10대 선왕(818~830) 대인수, 건흥, 침체된 국세회복

 * 818~820년 - 신라와 요동방면 공략

 * 828년 - 일본이 발해와의 사사로운 교역을 금지

 

11) 제11대 이진왕(831~857) 대이진, 함화, 당나라와의 교류에 힘씀

 * 841년 - 하복연을 일본의 사신으로 보냄(24차)

12) 제12대 건황왕(857~871): 대건황, 일본과의 교섭

 * 859년 - 발해의 사신이 일본에 장경선명력을 전하여 1684년까지 사용

 * 861년 - 발해 사신이 일본에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하여 현재 석산사에 남아 있슴

13) 제13대 현석왕(871~894) : 대현석, 경왕, 일본에 사절단 파견

14) 제14대 위해왕(894~906): 대위해

15) 제15대 인선왕(906~926): 대인선, 애왕

 * 918년 - 왕건이 고려국 건국

 * 926년 -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 당함

 * 『구당서』 -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고구려)의 별종이다

 * 『신당서』 -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자이니, 성은 대씨이다.

 * 『삼국유사』 - 고구려의 옛 장군 조영의 성은 대씨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 『송사』권35 - 발해악 연습을 금지시킴(1185년), 발해금(12c)

 * 『금사』권39 - 발해교방과 발해악 언급(1190~1195년)

 * 『금사』권12, 『해동역사』권22- 발해교방 30명 언급(1204년)

 

3. 발해에 대한 인식의 변화

1) 신라와 발해는 서로 교류·경쟁·대립하며 220여년간 병존

2) 고려: 후삼국을 합치고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유민을 적극 포섭 - 발해가 있던 만주지역이

  우리의 역사에서 밀려남,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발해를 제외

3) 조선전기: 신라 중심적인 국가계통론이 자리를 굳힘

4) 조선후기: 유득공『발해고』, 김정호『대동지지』신라와 발해가 양립했던

  <남북국시대>로 적극적인 관심표명

5) 논의의 쟁점(신라의 삼국통일)

 (1) 남한: 우리 역사에서 비로소 하나의 영토·국민으로 이루어진

  단일민족국가 성립, 삼국통일이 갖는 의의 강조, 삼국 - 통일신라 - 고려로 이어지는 계통

 (2) 북한: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잘못,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 비판적인 시각에 의해

  통일이 아닌 국토남부의 통합으로 규정, 고조선 - 고구려 - 발해 - 고려, 고려가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 성립

 (3) 1970년대: 이우성의 제안 - 통일신라와 발해를 같은 비중으로 볼것, 남북국시대 사용

 (4) 반대 : 신라와 발해가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이 아님, 당시 신라와 발해 사이에 동족의식이 없음

 

4. 정효공주묘

1) 중국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용두산에 위치한 유적

2) 1980년 10월에 발견(이곳은 발해 5경 중 중경에 해당), 문화혁명 때

  소꼴을 먹이던 학생에 의해 우연히 발견, 연변박물관에 의해 긴급 발굴

3) 주인공은 둔화(敦化) 육정산(六頂山)에 있는 대흥무(文王:737~793)의 둘째딸인

  정혜공주의 동생, 즉 문왕의 넷째 딸임이 밝혀짐

4) 높이 106㎝,너비 58㎝,두께 26㎝의 해서체로 음각된 비문은

  18행으로 모두 728자가 선명하여, 정혜공주묘비에서 판독하지 못하였던 부분도 대부분 확인가능

5) 무덤 바로 위의 벽돌탑은 불교식 장례를, 무덤길을 따라 내려간 곳에 만들어진 무덤칸은

  벽돌과 돌로 쌓았으며 천장은 길다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았는데 이것은 공간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고구려식으로 알려져 있음

6) 무덤칸의 벽면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벽화를 통해 발해인들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짐작

 

 

7)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 12명의 인물 벽화가 있는

정효공주묘 무덤 안칸 동벽도('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8) 발해 음악: 고구려 음악+ 말갈 음악흡수, 당의 음악문화 수용.

  현재 일본에 발해사신과 관련된 간접사료가 전하며, 정효공주묘의 비파,

  공후, 박판의 3인 악사(정인갑 보고)

 

9) 발해의 고분벽화는 중국 허룽(和龍)현의 정효공주묘,

  닝안(寧安)시 상경성(上京城) 부근의 싼링둔(三靈屯) 2호분 등과

  북한에서 발견된 금성리 고분이 있음.

 

10) 무덤길과 동,서,북쪽 벽에 그려진 12명의 인물 :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 사후(死後) 세계에서도 공주를 모신다고 상상한 이들의 그림들.

무사들이 집을 지키며 몸종들이 시중을 들고 악사들이 노래를 연주하여

즐겁게 하며 시종들이 일산(日傘)을 받쳐 햇볕을 가려 주는 내용 등

 

11) 당시의 미녀상인 통통한 얼굴을 한 여인들이 시중을 들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

 

12) 무덤과 벽화로 인한 한중 학자들 간의 이견:

▶ 중국 - 벽돌을 쓰는 무덤 양식이나 통통한 얼굴의 회화양식이

  모두 전형적인 당나라 풍이라고 주장

▶ 한국 특히 북한 학자들 - 벽돌을 사용하더라도 무덤 양식은 고구려의 것을 이어받고

  회화에서 유행을 따르기도 하지만 벽화를 그리는 풍속은 역시 고구려적이라고 주장

▶ 유물들은 도굴되어 거의 없어졌지만 무덤 형태는 완벽했고, 벽화 역시 잘 보존되어 있어

  자료가치 충분. 도자기 인형 2점, 정효공주와 그 남편의 것으로 보이는 뼈,

  도금한 청동장식물 조각들도 발견

▶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묘지석(정효공주묘지병서貞孝公主墓誌幷序)은

  발해사의 실체를 좀더 선명하게 함

▶ 문왕의 존호(尊號) 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에서 대흥과 보력은

  발해에서 사용하던 고유 연호이고, 효감, 금륜, 성법은 불교용어

▶ 발해왕은 '황상(皇上)'을 자칭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자주적이었다는 것으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

  장하는 중국의 주장과는 전적으로 대치

▶ 여러 폭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이 묘는 미술사적으로나 복식사 및 문화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중국의 '국가급 문물보호단위'의 반열에 놓이게 됨

▶ 정효공주묘비는 발해시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자주성과 문화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증거물 -

  즉, 문왕대의 정치상황, 공주의 시호(諡號)와 생몰년대,

  발해 당시의 문자사용 예와 문학적 소양, 서체와 장례법,

  당시의 역법(曆法)과 귀족들의 생활, 풍습 등 다양한 부분

 

▶ 정혜와 정효공주의 묘비에는 문왕의 심정이 나타나있는데, 두 딸 모두 출가하여

 정혜공주는 40세인 777년에  아들 하나를 두고, 정효공주는 36세인 792년에

 딸 하나를 두고 일찍 사망하였으니, 부왕의 슬픈 마음을 화려한 공주들의 무덤으로 표현

▶ "황상(皇上)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은 관청에 명하여 완비토록 하였다.

 상여꾼의 목메어 우는 소리 발길 따라 머뭇거리고 수레 끄는 말의 슬피우는 소리

 들판 따라 오르내리는 구나. 한나라 악읍(鄂邑) 공주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 넘고 당나라 평양(平陽) 공주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5. 발해국민들의 종족기원

① 숙신의 옛땅(肅愼故地) - 상경 - 용천부 남부 중경 - 현덕부  ② 예맥의 옛땅(濊貊故地) - 동경 – 용원부

③ 옥저의 옛땅(沃沮故地) - 남경 – 남해부

④ 고려의 옛땅(高麗故地) - 서경 – 압록부

⑤ 부여의 옛땅(夫餘故地) – 부여부  ⑥ 읍루의 옛땅(相婁故地) – 정리부 ⑦ 솔빈의 옛땅(率賓故地) – 솔빈부

⑧ 불열의 옛땅(拂涅故地) – 동평부  ⑨ 철리의 옛땅(鐵利故地) – 철리부  ⑩ 월희의 옛땅(越喜故地) - 회원부

* 참고문헌- 정진현, 한규철외『 연구총서-고구려와 발해의 계승관계』,

* 고구려연구재단,  2004; 허성정,『아! 고구려②』, 유림, 2004;

  방학봉,『발해사 연구』,정음사, 1989; 한규철의 인터넷자료 검색

 송방송,“발해악소고” 『한국고대음악사』

* 이진원,“발해악신고” 『한국음악사학보』35집

 

6. 발해사 연구현황

1)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사람들은 지금까지

  총 1,972편의 발해사 연구를 발표, 공동의 관심사를 표명하고 있다,

2) 러시아와 일본 - 연해주토착민, 중국 - 소수민족의 역사

3) 中國이 894편 45.3%로 다른 나라에 비해 가장 많고,

    日本이 435편 22.1%,

    韓國이 380편 19.3%,

   러시아가 263편 13.3% 였다.

4) 분야별 연구 현황 - 중국과 러시아, 북한은 현장관련 고고학 발표문들이 많았고,

  한국은 문헌사 적인 면에서, 연구사나 외교관계, 유민관계 및 종족과 사회관련 발표가  많았다.

5) 전체 1,972편 중 고고학 관련 글(考古一般, 遺蹟, 紀行관련, 都城·建築·寺院·古墳·古墓)이

  593편 30%로 가장 많고, 가장 적은 분야는 언어, 문자에 관한 것으로 6편 0.3%이며,

  다음이 사상, 종교 등으로 15편 0.7%, 인물, 교육 등은 17편 0.9%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