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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의 음악문화

 

 

2. 신라의 왕

1) 삼국: B.C.1~668, 통일신라: 668~877, 후삼국: 877~936

2) 1대 시조 혁거세(BC57~AD4) 거서간 박혁거세

3) 2대 남해(4~24) 차차웅, 왜국과 낙랑과의 전투

4) 3대 유리(24~57) 이사금

5) 15대 기림(298~310) 국호를 신라로 칭함

6) 19대 눌지(417~458) 묵호자가 불교전래

7) 20대 자비(458~479) 왜국에 대승, 고구려에 대응

8) 22대 지증왕(501~514) 순장금지, 왕호사용

9) 23대 법흥왕(514~540) 가야와 혼인, 이차돈순교, 가야항복

10) 24대 진흥왕(540~576) 백제와 화친, 우륵과 가야금, 황룡사건축, 원화와 화랑

11)  27대 선덕여왕(632~647) 첨성대(국보31호)

12)  28대 진덕여왕, 29대 무열왕

13)  30대 문무왕(661~681) 삼국통일  

 

https://youtu.be/BpZrhf6H220

 

3. 토우

1)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빚은 흙인형[土偶] 이 신라지역에서 여러 개 출토되었는데,

 가실왕이나 우륵의 생존연대보다 앞서고 있다. 비파연주, 입창상토우

2)  6세기 이전의 신라토우 - 신라 토우에 나타난 금(琴)에 관한 자료는 현재까지 12점이 확인

3) 1992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의 자료 4점

  - 고배 뚜껑의 토우 1점, 탄금토우 1점, 출토미상의 토우 2점

4)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7점

 - 토우장식 장경호 1점, 인물토우장식 1점, 탄금토우  2점, 주악토우 3점

5) 2000년 경주 경마장 부지에서 금(琴) 연주 유물이 1점 출토

토우 - 비파연주, 서서 노래 부름(입창)

 

인물토우
장경호(왼쪽)의 목부분을 확대(오른쪽)

 

4. 일본 정창원(쇼소잉)소장 가야금

 

일본 정창원소장 신라금 앞뒤면

1) 정창원은 일본 나라에 있는 도다이지의 부속 건물로 건립되었는데,

  훗날 일본 황실의 귀중품을 소장・관리하는 곳이 됨

2) 시라기고토를 비롯한 비파・완함(阮咸)・금(琴), 여러 가지 관악기 등

  약 18 종류의 악기 75 점이 5~8세기 무렵의 모습 그대로 보존

3) 그 중 시라기고토도 3대나 있는데, 쇼소잉측은 신라 가야금의 장식과 보존상태에 따라

  각각 ‘금가루를 이겨 그림을 그린 신라금’, ‘금박을 눌러 장식한 신라금’, ‘신라금 부서진 것’ 등으로 명명

4) 이 중 금가루로 그림을 그리거나 금박장식을 한 가야금은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움

 

 

5. 문헌

1) 삼국사기

   신라고기[羅古記]에 전하기를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으랴?” 하고는

  악사(樂師)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후에 우륵은 악기를 지니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왕은 그를 받아 국원(國原)에 안치하고,

  대내마 주지(注知)・계고(階古)와 대사 만덕(萬德)을 보내 그 업을 전수받게 하였다.

  세 사람이 이미 12곡을 전수받고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번잡하고 음란하니,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축약하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그 다섯 가지의 음곡을 듣고 나서는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만 하구나,

   너희는 그것을 왕의 앞에서 연주하라,” 

 

2) 삼한시대에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고’라는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가실왕이 가야금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전해오는

  고유의 현악기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가야금처럼 개량한 것으로 보임

3)  이 시기의 토우에 보이는 악기나 9세기 일본에 전해져

  현재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가야금 (일본에서는 신라금이라 부름)의 모양은

  오늘날의 풍류가야금과 크기나 모양이 거의 같음

 

4) 일본서기

  신라왕이 천황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서 놀라고 슬퍼하면서 조공으로

  배 80척과 여러 음악인 80명을 보냈다. 이들은 대마도에 머물러

  하루를 묵으면서 크게 곡을 했고, 츠쿠시에 이르러서도 또 크게 곡을 했다…(중략)…

  왕도에 이르기까지 소리내어 울기도 했고 노래와 춤을 추기도 했으며…

 

▶ 신라음악에 관한 문헌: 삼국사기, 수서, 일본서기, 일본후기(신라악사 2인 금∙ 무등사야)

 

6. 신라의 음악

1) 우륵에 의하여 전해진 가야의 음악과 노래·춤 등이 신라 궁중의 음악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당시 신라의 음악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소박한 상태

2) 일본에 전해진 삼국의 음악도 신라악은 단지 금(가야금), 노래, 춤으로 구성된

  단순한 편성의 음악, 풍속악 또는 풍속무라 함으로써 지역적 특색이 두드러지는 향토음악일 가능성

3) 신라의 지리적 위치가 중국 등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불편하였기 때문에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음악은 고유의 향토성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임

4) 신라의 향토음악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등에 풍부하게 보임

 - 유리왕(24-57년)때 음악인 회악(會樂, 會蘇曲), 탈해왕(57-80년)때 음악인 돌아악(突阿樂),

    자비왕(458-478년)때 백결선생이 지은 대악

 - 이 외에도 신라 여러 지역 음악의 제목이 전해지나, 음악적인 내용은 알 수 없음

 

7. 최초의 음악기관- 음성서

1) 삼국통일 이전에 국가기관으로 예부(禮部)에 설치하고, 관리들을 두어 음악과 관련된 일을 보게 함.

2)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기관

3) 통일 이후 경덕왕 때 대악감(大樂監)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혜공왕 때 다시 음성서로 고침.

4) 궁중의 의식이나 연회와 관련된 음악행정을 맡아보았음

5) 화랑도의 수련과정 등을 통하여, 신라에서는 청소년의 정서수련에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임

 

8. 가야의 음악

1) 가야의 음악은 가야금 음악으로 대표

2)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이 지은 12곡

- 하가라도(함안군), 상가라도(고령군), 보기(곡예), 달기(달기현),

   사물(사물현), 물혜(마리현), 하기물(금물현), 사자기(기악),

   거열(거창군), 사팔혜(팔혜현), 이사, 상기물(하기물) 등

   각 지방의 향토음악과 민간에 전승되던 놀이를 토대로 만든 음악

3) 우륵의 가야금 음악은 제자들에 의하여 보다 아정(雅正)한 음악으로 다듬어져 신라의 대악(궁중음악)이 됨

 

 

※ 정리

1) 신라의 음악문화 - 6c이전  향토음악(68-69쪽), 음성서 등장

 

2) 가야국의 음악문화 - 가야고의 출현과 악기의 구조(가실왕), 우륵의 12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