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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왕산악과 거문고이야기

카테레사 2022. 8. 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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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악성인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의 우륵, 조선의 박연(1378-1458)에 대해 들어보셨죠?

 

첫번째로 왕산악에 대해 살펴볼까합니다.

三國史記  卷第三十二 雜志 第一 음악[]
거문고의 고구려 전래와 제작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

거문고(玄琴)의 제작.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 이르기를 처음에 진 ()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高句麗)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악기(樂器)임은 알지만 그 성음(聲音)과 연주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국인(國人) 중에 능히 그 음()을 알고 연주하는 자를 구하여 후한 상을 준다 하였다.

이때 둘째 재상(第二相)왕산악 (王山岳)이 그 본 모습을 보존하면서

그 법식과 제도를 약간 고쳐 바꾸어 이를 만들고 겸하여 1백여 곡을 지어 이를 연주하였다.

이때에 검은 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니 마침내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하고

그 후로는 다만 거문고(玄琴)이라 불렀다라고 한다.

 

 <삼국사기 악지> 에 보이는 왕산악에 대한 기록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 난해한가요?

일단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자면, 왕산악은 고구려의 제2상에 해당하는 높은 관료이며,

중국의 진시대(서진265∼316, 동진316~419)에 생존한 인물로서

현악기에 탁월한 연주자이고 작곡가이며, 악기 개량자이네요.

 

앞줄부터 다시 살펴본다면,

진나라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소리를 내야하는 지 전혀 몰랐다는 거죠.

오늘날에는 매스컴이나 SNS가 발달되어 외국에서 공연하거나 사건사고들까지 실시간 검색이 가능한데,

그 당시에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론, 주변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었죠.

 

낯선 악기이기에 선뜻 연주하는 사람이 없자

연주자에게는 후한 상을 준다는 공고문을 내게 됩니다.

그러자 오늘날 국무총리와 같은 신분의 왕산악이

악기의 본모습은 그대로 둔 채 부분적으로 약간 개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개량된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100여곡의 작곡을 했고,

그 곡들을 거문고로 연주하니 검은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겁니다.

 

일단 한자를 보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게 한 악기로서 검을 (), 학(), 거문고 ()현학금으로 부르다

이후 가운데 글자인 자를 빼고 현금으로 부르죠.

한글 명칭은

국가명인 고구려 혹은 검다는 의미의 거믄과 고대 현악기를 의미하는 를 합쳐

거믄고로 불렀고 현재는 거문고로 부르게 된거죠. 

 

칠현금과 거문고의 모양과 연주방법이 유사할까요?

 

당(618~907)나라 시대의 칠현금
좌: 명대(1368~1644)의 칠현금 연주모습/ 우:마왕태3호묘(BC168), 건륭황제(1736~95)시대의 칠현금                    (출처:중국고대악기백도)

 

칠현금의 특징은 줄을 받치는 안족이나 괘가 없죠.

연주자세는 커다란 받침대 위에 올려놓거나 바닥에 놓고 앞으로 약간 숙여 연주하죠.

이번에는 우리나라 악서인 [악학궤범]에 보이는 금의 구조입니다.

 

  

 

이번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거문고 연주모습과 현행 거문고 악기의 모습입니다.

 

거문고와 칠현금의 차이점 보이시나요?

첫째, 거문고는 6줄에 16괘 /  칠현금은 7줄에 13개의 휘( 괘나 안족이 없음)

둘째, 거문고는 무릎에 비스듬히 기대어 오른손의 술대로 현을 쳐서 연주  /

         칠현금은 탁자 위나 바닥에 놓고 손으로 연주, 술대 없슴

 

 

왕산악과 거문고에 대해 정리하자면, 

 

1) 거문고의 제작연대가 불분명하다.

2) 우리민족의 고유한 고정괘가 왕산악(265~420)에 의해 제도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왕산악은 칠현금과 유사한 현악기를 다룰 줄 아는 전문음악인이었다.

4) 주체적이며 창의적으로 개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