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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후기에는 정계를 떠난 사림파 선비들과 경제적으로 부유한 중인층이
음악 수용층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 분들은 예악사상이 투철했고, 풍류수단으로 거문고를 애용했으며,
풍류활동을 즐겼다.
20세기가 장발에 통기타 문화였다면
21세기는 색소폰이나 드럼을 연주할 줄 알며, 청바지를 즐겨 입는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렇게 시대별로 선호하는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다시 조선시대를 둘러 본다면,
성악곡인 가곡 가사 시조를 발전시킨 가객들과
기악곡인 영산회상을 발전시킨 풍류객들이 있었다.
가객에 의해 불렸던 곡들은 정가(正歌, 바른 음악)라고 하며,
가곡 가사 시조가 이에 해당된다.
가곡에 대해 좀 더 살펴본다면? ^^
가곡이란 국악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시조시를 노래 부르는 성악곡이다.
앞의 1분30초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을 대여음이라 하고
중간 5분정도가 지나면 또다시 악기반주에 해당되는 중여음이 있다.
가곡의 형식은 시조의 초장, 중장, 종장인 3장을 5장으로 늘려서 부르며
전주나 후주부분에 해당하는 대여음과
간주부분에 해당하는 중여음이 있어 시조보다 훨씬 길다.
가곡에는 느리게 부르는 16박 장단의 초수대엽, 이수대엽 등의 곡과
빠르게 부르는 10박장단의 곡들이 있다.
초수대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동창이'는 남구만(1629~1711)이 지은 평시조이며,
노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을 즐기며 쓴 작품이다.
초장: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중장: 소치는 아희놈은 상긔 아니 일었느냐.
종장: 재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허느니의 3장 형식을
가곡에서는
1장-동창이⑪ 밝았느⑤+⑪냐⑤
2장-노고지리⑪ 우지진다⑤+⑪
3장-소치는⑤ 아희놈은⑪ 상긔⑤ 아니 일었느냐⑪+⑤
4장-재넘어⑯+⑪
5장-사래⑤긴밭을⑪ 언제⑤갈려⑪ 허느니⑤+⑪로
부르는 것이다.
동그라미 숫자는 박(拍)을 나타내는데
1장만 풀어보기로 한다.
'동창이' 세글자는 11박, '밝' 은 5박, '았느' 11박, '냐' 는 5박으로
모음의 변화를 시키며 길게부르는 <어단성장>이 특징이다.
노랫말을 본다면
1장~2장에서는 밝아오는 해와 하늘 높이 날며 지저귀는 종달새의 평화로움
3장~5장에서는 일꾼이 빨리 일어나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나타난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재촉하는 것이 아닌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가곡과 시조 모두 같은 시조시를 노랫말로 하는데
가곡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해금 피리 장고 등의 악기반주에 맞추어 5장으로 부르는 반면,
시조는 장고장단에 맞추어 3장으로 부른다.
시조는 악보를 보면서 들으니 이해가 쉽지 않으셨나요?
악보의 한칸은 한박으로
제일 위는 노랫말, 중간은 음높이 (황 중 임 3음), 아래는 반주인 장고로 5 8 8 5 8박을 나타낸다.
발성법은 학교에서 배우는 벨칸토창법과는 약간 다르다.
벨칸토창법은 서양의 발성법으로 이태리어나 독일어, 영어 등을 아름답게 발성할 수 있도록 연구된 반면,
가곡과 시조의 발성법은 우리말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발성할 수 있도록 발전되었다.
성악곡들이 대부분 소리를 단전에서 끌어올려 횡경막을 부풀려 온몸을 공명통으로 사용하지만,
내뱉는 과정에서 벨칸토창법은 두성, 판소리는 내지르는 목, 가곡은 덜미목을 사용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가곡은 한사람의 독창과 거문고, 가야금, 대금, 세피리, 해금, 장고 등의 실내악 반주로 편성된다.
여기에 단소와 양금을 추가하여 감미롭고 상큼한 맛을 더할 수도 있다.
한사람의 독창은 여자가 하면 여창가곡, 남자가 하면 남창가곡,
남녀가 함께 부르면 남녀병창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배웠던 가곡이란 <보리밭>, <청산에 살리라> , <비목> 등이지만
여기서 살펴본 가곡은 <동창이 밝았느냐>, <청산리 벽계수야>, <태산이 높다하되> 등의
시조시를 노랫말로 하는 전통 성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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